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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 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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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타르 해협은 러시아,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는 마미야 해협으로도 불린다. 사할린 섬과 아시아 대륙 사이의 해협으로, 과거 유럽에서는 중앙아시아, 북아시아를 아우르는 지역을 지칭하는 '타르타리아'에서 유래되었다. 1644년 러시아의 탐험, 1787년 라 페루즈의 해협 지도 제작 등을 거쳐, 1848년 겐나디 네벨스코이가 처음으로 해협을 통과했다. 1973년부터 바니노-홀름스크 철도 페리가 운행되며, 2000년대에는 해저 파이프라인이 부설되었다. 1983년에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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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 해협
지리 정보
위치유라시아 대륙과 사할린 섬 사이
길이
명칭
한국어타타르 해협
러시아어Татарский пролив (타타르스키 프로리프)
일본어間宮海峡 (마미야 카이쿄)
영어Tatar Strait (타타르 스트레이트)
역사적 명칭
이전 명칭만주 해협
관련 인물장프랑수아 드 라페루즈
관련 인물 (일본)마미야 린조
지리
연결 해역 (북)오호츠크해
연결 해역 (남)동해
주요 항구바니노, 홀름스크

2. 명칭

일본에서는 이 해협의 명칭을 '''마미야 해협'''이라고 부르지만, 러시아, 미국, 영국, 중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는 이 해협의 명칭을 '''타타르 해협''' (Татарский пролив|타타르스키 프롤리프ru, Strait of Tartary|스트레이트 오브 타르타리영어 ''or'' Tatar Strait, 韃靼海峡|다단해협중국어)[12][13]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도 타타르 해협, 닷탄 해협, 韃靼海峡이라고 표기된 지도가 존재한다.

또한, 해협 전체의 명칭을 '''타타르 해협'''으로 하고, 최협부의 명칭을 '''네벨스코이 해협 또는 헤이룽수이'''[14]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미야 해협'이라는 명칭은 타타르 해협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최협부의 네벨스코이 해협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유럽에서는 내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북아시아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타르타리아'를 사용했다. 이 지명은 중국과 북아시아의 해협 등을 지배했던 원나라를 포함한 여러 튀르크계와 몽골계 민족의 반유목 국가에 적용된 중세 민족명인 타르타루스에서 유래한 것이다.[15]

명청 교체가 진행되던 1644년, '타르타루스'라는 명칭은 만주족에게도 사용되게 되었고[15], 만주와 몽골은 "Chinese Tartary"로도 알려지게 되었다.[16] 그 결과, 1787년 라 페루즈 백작 장 프랑수아 드 갈로가 사할린 섬과 대륙부의 "Chinese Tartary" 사이의 해협 대부분을 지도 제작했을 때, 이 수역이 타타르 해협으로 불리게 되었다.

3. 역사

사할린과 맞은편의 연해주에는 옛날부터 아이누, 니브흐, 윌타, 여진 (만주족) 등의 민족이 거주하며 왕래했다.

1644년 명청 교체기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부상하면서, "타타르족"이라는 이름은 만주족에게도 적용되었고,[2] 만주(및 몽골)는 유럽인들에게 "중국 타타르"로 알려지게 되었다.[3] 라 페루즈가 1787년에 사할린과 중국 본토 사이의 해협 대부분을 지도화했을 때, 이 수역은 타타르 해협(또는 타타르 해협, 타타르 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787년 라 페루즈가 "타타르 해협"의 해안 지도를 만들었다. 서쪽의 인접한 땅은 당시 "중국 타타르"라고 불렸다.


일본에서는 1808년에 해협을 탐험한 마미야 린조의 이름을 따서 이 해협을 명명했고,[4] 이 이름은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가 그의 저서 ''일본의 묘사 기록''(1832–54)에서 소개했다.

러시아 지도에서, 해협의 가장 좁은 구간(아무르강 하구 남쪽)은 1848년에 이 지역을 탐험한 겐나디 네벨스코이 제독의 이름을 따서 네벨스코이 해협이라고 불린다. 그 북쪽, 아무르강이 흘러 들어가는 수역은 아무르 리만이다. 그리고 "타타르 해협"이라는 이름은 네벨스코이 해협 남쪽의 가장 넓은 수역에 사용된다.

타타르 해협은 남쪽에서 접근할 때 얕아지고 만의 머리처럼 보여 유럽 탐험가들에게 수수께끼였다. 1797년 윌리엄 브로턴도 타타르 만이 만이라고 판단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69년 6월 5일, 일본의 화물선 제1신영환(2996톤)이 치하초프 만을 출발한 곳에서 선체에 강한 충격을 받아 거주 구역이 대파되었다.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후에 소련 대사관 부무관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신영환에 소련 측의 훈련용 미사일이 명중했다는 것을 시사했다.[18]

''S-117''는 1952년 12월 15일경, 일본해의 타타르 해협에서 원인 불명으로 침몰한 소련의 슈카급 잠수함이었다. 이 잠수함은 수상함과 충돌했거나 기뢰에 의해 침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고로 47명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3. 1. 초기 역사

사할린에는 아이누, 니브흐족, 윌타족 등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예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사할린을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644년에 만들어진 일본의 지도에도 사할린은 섬으로 그려져 있다.[17]

1644년 러시아 보야르코흐 부대는 아무르강 하구 부근에 도착하여 월동하였다. 그들은 여기서 사할린 북서 해안을 탐색했고, 사할린이 섬이라는 것과 그곳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7]

1709년 청나라 강희제아무르강 하류 유역에 예수회 선교사를 포함한 탐험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이 지역의 위도와 경도를 포함한 여러 가지 실측을 실시하였다. 다음 해에도 새로운 탐험대를 파견하여 사할린에 상륙하여 섬을 탐사하였다. 18세기 중순, 청은 사할린의 일부 지역에 조공을 부과하기도 하였다.[17]

1787년, 프랑스 해군 장교 라 페루즈는 사할린과 아시아 대륙 사이의 해협 항해를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1804년, 나가사키에 내항한 러시아의 항해사 크루젠슈테른은 귀로에 사할린 탐험을 했지만 해협 통과에 실패했다. 라 페루즈와 크루젠슈테른은 해협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해수의 염분 농도가 저하되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사할린이 반도가 아니냐는 논쟁이 일어났다.[17]

1800년 전후 사할린이 "섬"인지 반도인지에 대한 논쟁에 결착을 내기 위해 에도 막부천문방의 다카하시 가게야스는 마쓰다 덴주로, 마미야 린조를 사할린에 파견하여 탐험하게 했다. 1808년, 서해안을 탐험한 마쓰다는 해협 최협부에 도달하여 이곳이 해협임을 확인했다. 처음 동해안을 탐험하고 있던 마미야도 마쓰다와 합류하여 마찬가지로 해협을 확인했다. 이듬해 1809년, 마미야는 현지인의 배로 해협을 건너 대륙으로 건너가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했다. [17]

지볼트는 마미야 린조의 조사를 평가했다. 저서 『일본』에서 타타르 해협의 최협부를 "Str. Mamia seto 1808 (마미야의 瀬戸)"라고 기재했다. 단, 해협 자체는 "Kanaal van Tataryen (타타르 해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17]

마쓰다 덴주로, 마미야 린조의 조사에서도 해협이 선박 통항이 가능한지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없었다. 1848년, 러시아의 겐나디 네벨스코이는 세계 최초로 이 해협을 선박으로 통과했다.[17]

3. 2. 원나라와 청나라의 영향

원나라는 사할린 몽골 침략 당시 해협을 건넜다. 몽골 원나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요새의 잔해가 오늘날 사할린에서 발견되기도 한다.[2]

1709년 청나라 강희제아무르강 하류 유역에 예수회 선교사를 포함한 탐험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이 지역의 위도와 경도를 포함한 여러 가지 실측을 실시하였고, 다음 해에도 새로운 탐험대를 파견하여 사할린에 상륙하여 섬을 탐사하였다. 18세기 중순, 청은 사할린의 일부 지역에 조공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타타르"는 유럽인들이 중앙아시아, 내륙 아시아, 북아시아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오래된 명칭이다. 이 지명은 중국과 북동아시아의 해협을 지배했던 원나라를 포함하여 다양한 튀르크족몽골의 반유목 제국에 적용된 중세 민족 명칭 타타르에서 유래되었다.[2] 1644년 명청 교체기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부상하면서, "타타르족"이라는 이름은 만주족에게도 적용되었고,[2] 만주(및 몽골)는 유럽인들에게 "중국 타타르"로 알려지게 되었다.[3]

3. 3. 유럽의 탐험과 마미야 린조

1787년, 프랑스 해군 장교 라 페루즈는 사할린과 아시아 대륙 사이의 해협 항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4] 1804년, 나가사키에 내항한 러시아의 항해사 크루젠슈테른은 귀로에 사할린 탐험을 했지만 해협 통과에 실패했다. 라 페루즈와 크루젠슈테른은 해협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해수의 염분 농도가 저하되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사할린이 반도가 아니냐는 논쟁이 일어났다.

1800년 전후 사할린이 "섬"인지 반도인지에 대한 논쟁에 결착을 내기 위해 에도 막부천문방의 다카하시 가게야스는 마쓰다 덴주로와 마미야 린조를 사할린에 파견하여 탐험하게 했다. 1808년, 서해안을 탐험한 마쓰다는 해협 최협부에 도달하여 이곳이 해협임을 확인했다. 동해안을 탐험하던 마미야도 마쓰다와 합류하여 해협을 확인했다. 1809년, 마미야는 현지인의 배로 해협을 건너 대륙으로 건너가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했다.[4]

지볼트는 마미야 린조의 조사를 평가했다. 저서 『일본』에서 타타르 해협의 최협부를 "Str. Mamia seto 1808 (마미야의 瀬戸)"라고 기재했다. 단, 해협 자체는 "Kanaal van Tataryen (타타르 해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4]

마쓰다 덴주로와 마미야 린조의 조사에서도 해협이 선박 통항이 가능한지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없었다. 1848년, 러시아의 겐나디 네벨스코이는 세계 최초로 이 해협을 선박으로 통과했다.[17] 해협의 최협부를 네벨스코이 해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기린 것이다.

3. 4. 근현대사

사할린에는 아이누, 니브흐족, 윌타족 등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예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사할린을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644년에 만들어진 일본의 지도에도 사할린은 섬으로 그려져 있다.

1644년 러시아 보야르코흐 부대는 아무르 강 하구 부근에 도착하여 월동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사할린 북서 해안을 탐색했고, 사할린이 섬이라는 것과 그 곳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09년 청나라 강희제아무르강 하류 유역에 예수회 선교사를 포함한 탐험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이 지역의 위도와 경도를 포함한 여러 가지 실측을 실시하였다. 다음 해에도 새로운 탐험대를 파견하여 사할린에 상륙하여 섬을 탐사하였다. 18세기 중순, 청은 사할린의 일부 지역에 조공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1644년 명청 교체기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부상하면서, "타타르족"이라는 이름은 만주족에게도 적용되었고,[2] 만주(및 몽골)는 유럽인들에게 "중국 타타르"로 알려지게 되었다.[3] 따라서, 라 페루즈가 1787년에 사할린과 중국 본토 사이의 해협 대부분을 지도화했을 때, 이 수역은 타타르 해협(또는 타타르 해협, 타타르 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본에서는, 이 해협이 1808년에 해협을 탐험한 마미야 린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4] 이 이름은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가 그의 저서 ''일본의 묘사 기록''(1832–54)에서 소개했다.

18세기 초 프랑스 지도에 표시된 프리스 해협과 타타르 해협.


러시아 지도에서, 해협의 가장 좁은 구간(아무르강 하구 남쪽)은 1848년에 이 지역을 탐험한 겐나디 네벨스코이 제독의 이름을 따서 네벨스코이 해협이라고 불린다. 그 북쪽, 아무르강이 흘러 들어가는 수역은 아무르 리만이다. 그리고 "타타르 해협"이라는 이름은 네벨스코이 해협 남쪽의 가장 넓은 수역에 사용된다.

타타르 해협은 남쪽에서 접근할 때 얕아지고 만의 머리처럼 보여 유럽 탐험가들에게 수수께끼였다. 1787년 라 페루즈는 현지인들이 사할린이 섬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797년 윌리엄 브로턴도 타타르 만이 만이라고 판단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805년 아담 요한 폰 크루젠슈테른은 북쪽에서 해협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마미야 린조의 1808년 탐험은 유럽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겐나디 네벨스코이는 1848년 북쪽에서 해협을 통과했다. 러시아는 이 사실을 비밀로 유지했고 아무르 합병을 통해 크림 전쟁 중 영국 함대를 피했다.

''S-117''는 1952년 12월 15일경, 일본해의 타타르 해협에서 원인 불명으로 침몰한 소련의 슈카급 잠수함이었다. 이 잠수함은 수상함과 충돌했거나 기뢰에 의해 침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고로 47명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타타르 해협의 남동쪽 부분은 냉전 시대의 가장 긴장된 사건 중 하나가 발생한 곳으로, 1983년 9월 1일, 당시 미국 하원의원이었던 래리 맥도날드를 포함한 269명을 태운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영공을 침범하여 사할린섬 서쪽에서 소련 Su-15 요격기의 공격을 받았다. 이 비행기는 해협의 유일한 육지인 모네론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 선박의 지원을 받아 모네론섬 북쪽의 약 582.74km2 면적의 해협에서 집중적인 해상 수색을 실시했다.

3. 5.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9월 1일, 당시 미국 하원의원이었던 래리 맥도날드를 포함한 269명을 태운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영공을 침범하여 사할린섬 서쪽에서 소련 Su-15 요격기의 공격을 받았다. 이 비행기는 해협의 유일한 육지인 모네론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 선박의 지원을 받아 모네론섬 북쪽의 약 582.74km2 면적의 해협에서 집중적인 해상 수색을 실시했다.

4. 교통

2008년 5월 초의 바니노는 타타르 해협의 중요한 항구이다.


바니노-홀름스크 철도 연락선


1973년부터 바니노-홀름스크 철도 페리가 해협을 가로질러 운행하며, 본토의 하바롭스크 지방 바니노 항구와 사할린 섬의 홀름스크를 연결한다.[6][7]

지도를 보면 타타르 해협이 동해에서 오호츠크해로 가는 배, 예를 들어 바니노에서 마가단으로 가는 배에게 편리한 연결을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운 노선을 운영하는 SASCO에 따르면, 그들의 선박은 그런 방식으로 거의 운행하지 않는다. 바니노에서 마가단으로 가는 일반적인 겨울 노선은 쓰가루 해협을 경유하고 홋카이도를 돈다. 일반적인 여름 노선은 라페루즈 해협을 경유하고 사할린을 돈다. 마가단에서 바니노로 돌아올 때 짐이 적고 날씨가 좋을 때만 선박이 가장 짧은 노선, 즉 아무르 리만, 네벨스코이 해협 및 타타르 해협(''사할린스키 프로릴'')을 따라 항해한다.[8]

사할린과 본토 사이의 도로 및/또는 철도 연결을 제공하기 위한 해협 아래의 사할린 터널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 시작되었지만 그의 사망 후 미완성된 채로 버려졌다.[9] 최근 몇 년 동안 정치인들은 터널이나 다리에 대한 새로운 요구를 제기했다.[10]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할린 오하 유전에서 콤소몰스크나아무레까지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이 해협 바닥에 부설되었다.[19]

5. 해저 터널 및 교량 건설 계획

마미야 해협에 해저 터널을 건설하려는 계획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사할린 터널로서 195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일부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완공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터널 구상은 여러 차례 제안되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2020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 특별 대표인 세르게이 이바노프는 인테르팍스 통신에 다리를 포함하여 해협을 잇는 구상을 단념할 것을 밝혔다. 그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데 비해 운송할 화물이 적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20]

6. 타타르 해협의 항구



1973년부터 바니노-홀름스크 철도 페리가 해협을 가로질러 운행하며, 본토의 하바롭스크 지방 와니노 항구와 사할린 섬의 홀름스크를 연결한다.[6][7]

7. 등장 작품


  • 안자이 후유에의 시집 『군함 말리』(1927년)에 수록된 단시 「봄」에는 "나비 한 마리가 타타르 해협을 건너갔다."라는 구절이 있다.[1]
  • 토바 이치로의 가요 『타타르 해협』(2009년)은 마미야 린조의 모험을 힘차게 노래한다.[2]
  • 요시무라 아키라의 소설 『마미야 린조』(고단샤, 1982년 9월)는 마미야 린조의 일대기를 다룬다.[3]

참조

[1] 웹사이트 Tatar Strait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2021-01-20
[2] 서적 De Bello Tartarico Historia https://books.google[...] Antwerp 1654
[3] 간행물 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 https://archive.org/[...] La Haye: H. Scheurleer 1736
[4] 웹사이트 MAMIYA RINZO STRAIT,Asiatic Russia - Antique Prints and Antique Maps from http://www.vintage-v[...] Vintage-Views.com 2012-12-01
[5] 서적 Popular Mechanics https://archive.org/[...] Hearst Magazines 1956-06
[6] 웹사이트 http://www.ceebd.co.[...]
[7] 웹사이트 Liniya Vanino-Kholmsk http://www.sasco.ru/[...] Sasco.ru 2012-12-01
[8] 웹사이트 Liniya Vanino-Magadan http://www.sasco.ru/[...] Sasco.ru 2012-11-15
[9] 웹사이트 СТРОИТЕЛЬСТВО № 506 http://www.sakhalin.[...]
[10] 뉴스 Plan for Tunnel to Sakhalin Unveiled http://www.sptimes.r[...] 2000-11-28
[11] 웹사이트 日本海の生い立ちと海底地形の特徴 http://nippon.zaidan[...] 日本財団 2020-12-20
[12] 웹사이트 デジタル大辞泉「韃靼海峡」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3-02-07
[13] 문서 韃靼
[14] 웹사이트 樺太ギリヤク語 https://web.archive.[...] 朝日新聞社 1942
[15] 서적 De Bello Tartarico Historia https://books.google[...] Antwerp 1654
[16] 간행물 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 https://archive.org/[...] La Haye: H. Scheurleer 1736
[17] 문서 크림 전쟁 관련 내용
[18] 뉴스 '소련대사관부 무관, 제1신에이마루 사건에 대해 사과' 1969-07-02
[19] 웹사이트 사할린 1 프로젝트의 파이프라인 부설 완료와 원유 수송 개시 http://www.eng.nssmc[...] 신일철주금 엔지니어링 2014-03-14
[20] 뉴스 사할린・본토 잇는 구상 단념, 러시아 대통령 특별대표 "비용 너무 높아" https://www.yomiuri.[...]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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